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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배터리 기업들은 왜 AI에 미래를 걸어야만 했을까?

Published Mar 29, 2026

“거의 모든 서구 배터리 회사들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죠.”

매사추세츠에 본사를 둔 배터리 회사 SES AI의 CEO, 치차오 후(Qichao Hu)는 서구 배터리 산업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이렇게 진단합니다. 한때 전기차(EV)와 같은 주요 산업을 위한 첨단 리튬 메탈 배터리를 대량 생산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가졌던 이 회사가 이제는 AI 기반 재료 발견이라는 완전히 다른 길에 자신들의 미래를 걸고 있습니다. 이 극적인 전략적 전환은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를 넘어, 전 세계 배터리 산업, 특히 서구 기업들이 직면한 심각한 위기 상황을 명확히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신호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 CEO는 이러한 피벗이 “서구 기업이 지속 가능한 사업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SES AI와 같은 유망했던 배터리 스타트업을 이토록 급진적인 변화로 이끌었을까요? 그리고 AI가 배터리 산업의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요? 이 글에서는 SES AI의 사례를 통해 전통적인 배터리 제조의 한계와 AI 기반 신소재 발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비교 분석하며, 업계의 미래를 심층적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서구 배터리 기업들의 고난: 제조의 한계와 시장의 변화

SES AI의 전신인 솔리드 에너지(Solid Energy)의 역사는 MIT에서 후 CEO의 대학원 연구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그의 연구는 지하 120℃가 넘는 고온 환경에서 작동해야 하는 석유 및 가스 탐사용 센서에 사용될 수 있는 고온 내성 배터리 개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들은 고온에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배터리를 목표로 고체 폴리머 리튬 메탈 배터리 기술을 선택했습니다. 일반적인 리튬 이온 배터리가 흑연 음극재와 액체 전해액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이 기술은 리튬 금속을 음극재로, 고분자를 전해액으로 사용해 셀의 에너지 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죠.

2012년 MIT에서 스핀오프한 솔리드 에너지는 2013년 첫 투자를 유치하며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석유 탐사 시장이 예상보다 작다는 현실을 깨닫고, 당시 막 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한 전기차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저온 환경에 더 적합하도록 화학 구조를 조정한 후, 회사는 매사추세츠와 상하이에 시험 생산 시설을 구축하며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2021년은 배터리 산업의 진정한 호황기였고, 전기차는 가장 뜨거운 분야였습니다. GM, 현대차, 혼다 등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이 차세대 배터리 기술에 막대한 관심을 보였고, SES AI도 이들과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SUV나 트럭처럼 큰 차량은 더 가벼운 배터리가 필요했기에, 고에너지 밀도 배터리는 아주 매력적인 솔루션으로 여겨졌습니다. 2022년에는 제조 용이성을 위해 리튬 메탈 대신 실리콘 음극재를 사용하는 배터리를 발표하며 기술 전환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성장이 둔화되고 투자 심리가 위축된 것이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적 지원 철회와 2025년 말 전기차 구매 보조금 종료는 미국인들의 전기차 선택에 주요한 장벽으로 작용했습니다. 후 CEO는 “이제는 모든 시장을 살펴봐야 한다”며 대규모 전기차 시장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하는 현실을 토로했습니다. 이처럼 서구 배터리 제조 기업들은 기술 개발의 지난한 과정, 막대한 자본 투자 부담, 그리고 급변하는 시장 및 정책 환경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며 생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Why this battery company is pivoting to AI

배터리 산업의 새로운 활로: AI 기반 재료 발견 플랫폼 ‘Molecular Universe’

이러한 위기 속에서 SES AI가 선택한 새로운 희망은 **‘Molecular Universe’**라는 AI 기반 재료 발견 플랫폼입니다. 회사는 이 플랫폼을 통해 다른 배터리 회사에 소프트웨어를 라이선스하거나, 플랫폼으로 발굴한 신소재를 개발하여 판매하는 사업 모델을 목표로 합니다. 즉, 직접 배터리를 대량 생산하는 대신, 배터리 개발의 가장 근본적인 단계인 재료 과학 혁신에 AI를 접목하여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죠.

‘Molecular Universe’ 플랫폼은 이미 6가지 새로운 전해액 재료를 식별했다고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는 실리콘 음극재 배터리의 수명을 개선할 수 있는 첨가제입니다. 실리콘 음극재는 높은 에너지 밀도로 각광받지만, 충방전 과정에서 크게 팽창하는 경향이 있어 물리적 손상을 유발하고 효율적인 충방전을 방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플루오로에틸렌 카보네이트(FEC)라는 물질을 사용해 음극재 표면에 탄성 필름을 형성하지만, FEC는 고온에서 분해되어 배터리 수명을 단축시키는 가스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SES AI의 AI 플랫폼은 FEC와 유사하게 작동하면서도 유해한 가스를 발생시키지 않는 화합물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이는 기존의 시행착오와 화학자들의 직관에 의존하던 재료 개발 방식에 비해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낼 수 있는 AI의 강력한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후 CEO는 SES AI의 오랜 역사와 깊이 있는 배터리 도메인 지식이 플랫폼을 유용한 도구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실제 AI 모델 자체보다는 수년간 배터리를 만들고 테스트하면서 축적된 SES AI의 전문 지식과 데이터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부분에서 주목할 점은 AI가 단순한 계산 도구를 넘어, 숙련된 인간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을 학습하여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물리적 배터리를 실제로 만들지 않음으로써 더 빠르게 확장하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그의 발언은 대규모 장치 산업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잘 드러냅니다. 사실 이건 배터리 제조업의 막대한 투자 부담과 낮은 마진율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AI 기반 서비스 모델로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대와 회의론의 교차로: AI 전환의 미래는?

하지만 모든 전문가가 이러한 AI 기반 재료 발견의 단기적 전망에 대해 낙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 저장 산업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 회사 Volta Energy Technologies의 기술 책임자 카라 로드비(Kara Rodby)는 “우리는 신소재 개발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배터리 산업 발전의 진정한 핵심은 아닌 것 같다”며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투자자들의 철회와 정부 지원 축소로 배터리 산업의 일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현시점에서 어떤 신소재를 발견하는 능력이 배터리 산업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로드비의 이러한 관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I가 가져올 장기적인 혁신 가능성은 분명하지만, 현재 배터리 산업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새로운 재료”의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자재 가격 변동성, 공급망 문제, 생산 규모의 경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책적 불확실성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 있습니다. AI가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상업적 규모로 양산되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까지는 또 다른 시간과 막대한 투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업계 흐름을 보면, AI는 미래 기술 경쟁력 확보의 필수 요소이지만, 당장 눈앞의 불을 끄는 만능 해결책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SES AI의 피벗은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일 수 있지만, 그 결실을 맺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예상된다는 것이죠.

SES AI의 이번 전략적 전환은 급변하는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서구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전통적인 제조 방식만으로는 아시아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한 셈입니다. AI 기반 재료 발견이라는 새로운 길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지만, 이는 배터리 산업이 단순히 물리적인 생산을 넘어 데이터와 지식, 그리고 혁신적인 사고방식이 중요해지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미래의 배터리 산업은 새로운 화학 물질, 변화하는 정책 환경, 그리고 지정학적 에너지 지형의 재편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할 것입니다. SES AI의 시도는 그 과정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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